닫기

[현수정의 씨어터토크]조승우의 ‘햄릿’, 개연성이 주는 관극의 재미

기사듣기 기사듣기중지

공유하기

닫기

  • 카카오톡

  • 페이스북

  • 트위터 엑스

URL 복사

https://m2.asiatoday.co.kr/kn/view.php?key=20241121010010684

글자크기

닫기

전혜원 기자

승인 : 2024. 11. 21. 10:18

원작의 깊이와 동시대성 함께 살려
토월정통연극 햄릿(예술의전당 제공)(1)
연극 '햄릿'의 한 장면. /예술의전당
셰익스피어의 '햄릿'은 끊임없이 무대에 오르는 작품이다. 그 이유 중 하나는 햄릿의 복잡미묘한 캐릭터에 있을 것이다. '햄릿은 왜 그랬을까?'라는 질문에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절호의 기회가 왔음에도 복수를 미루는 우유부단함, 오필리아를 향해 "수녀원으로 가!"라고 외치는 급발진, 어머니를 향한 강한 집착…. 이에 대해 학자들은 도덕적 딜레마, 우울증,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등을 분석했다.

예술의전당 토월극장에서 조승우가 연기한 '햄릿'(황정은 각색, 신유청 연출)은 엄청나게 똑똑하다. 모든 상황을 냉철하게 판단하고 계산하여 행동한다. 그저 우유부단하다기보다 정당성을 확보하며 신중하게 나아가는 것이다. 따라서 행동의 동기와 이유가 명확하게 보인다. 유랑극단 노배우(이남희)의 열연에 깊이 감화되어 자신의 마음을 무대 위로 쏟아내 보겠다고 결심하는 순간, 노르웨이 왕자의 거침없는 행보에 스스로를 성찰하며 복수를 다짐하는 모습 등등. 심리적인 개연성이 강조된 만큼 관객들이 좀 더 쉽게 몰입할 수 있다.

토월정통연극 햄릿(예술의전당 제공)(3)
연극 '햄릿'의 한 장면. /예술의전당
연인 오필리아(이은조)를 대하는 감정의 흐름도 자연스럽다. 순진한 오필리아를 앞세워 자신의 속내를 떠보려 하는 폴로니어스(김종구)에 대해 "아버지인지 포주인지 모르겠다"고 중얼거린다. 공격의 대상이 오필리아가 아님을 알려주는 대사다. 이어지는 수녀원으로 가라는 속삭임도 앞으로 일어날 풍파로부터 오필리아를 보호하려는 마음을 엿보게 한다. 어머니 거투르드(정재은)를 향해서는 윽박지르기보다 삼촌 클로디어스(박성근)와 침실로 가지 말라며 애원한다. 눈물범벅이 되어 "엄마를 사랑해서 하는 말이에요"라는 아들을 보며 내적 갈등에 빠지지 않을 어머니가 어디 있으랴.

조승우의 섬세한 연기는 관객들이 세 시간 내내 숨죽인 채 햄릿의 행보를 지켜볼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발음만 정확한 것이 아니라, 음절 하나하나를 의미로 가득 채웠다. 대사와 움직임에서 상투적인 연기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큰 소리로 오열하는 것보다 더 강렬한 침묵으로 잊을 수 없는 장면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오필리아의 주검 위에 조용히 꽃을 얹었을 때가 특히 그러했다. 그는 퇴장하면서도 슬픔에 몸서리치듯 고개를 작게 흔드는 동작으로 감정을 치밀하게 전달했다.
토월정통연극 햄릿(예술의전당 제공)(7)
연극 '햄릿'의 한 장면. /예술의전당
이번 공연은 햄릿을 전적으로 부각했다. 다른 캐릭터들은 비교적 약해 보이는 면이 있었는데, 이는 덴마크에서 홀로 깨어 있는 인물인 햄릿의 시각에서 다른 이들을 바라보도록 만들었다. 또 한편으로, 클로디어스 같은 인물은 셰익스피어의 인물들이 지닌 양면성을 잘 느끼게 했다. 어떻게 보면 부드럽고 유약한데 지시하는 행동은 잔혹하기 그지없다. 오히려 멜로드라마의 악인보다 권력자의 면모를 잘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싶다.

주목할 것은 이 공연이 햄릿의 복수를 개인적인 차원이 아닌 시대의 필연적 요구로 그렸다는 점이다. 햄릿 왕자는 선왕의 유령(전국환)을 마주한 이후, 시대의 '어긋난 관절'을 바로잡는 일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를 저주로 느끼며 고통 속에서 실행해 옮긴다. 그 결과 덴마크에는 완전히 새로운 시대가 열린다.

햄릿은 비범하고 영웅적인 인물로 시대의 흐름을 느끼고 집단의 운명에 영향을 끼친다. 그렇지만 그 역시 구시대에 속한 존재로서 스러지게 된다. 바로 여기서 비극성이 느껴진다. 미래를 이끌어갈 장본인은 햄릿이 아니라 노르웨이의 왕자 포틴브라스. 그는 덴마크의 선왕(햄릿의 아버지)에게 살해당한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왔다. 즉, 햄릿처럼 어긋난 것을 바로잡으려 하는 인물이다.

토월정통연극 햄릿(예술의전당 제공)(9)
연극 '햄릿'의 한 장면. /예술의전당
이러한 결말은 부조리한 삶과 세상을 원거리에서 바라보게 한다. 그리스 비극에서 그러하듯, 여기서도 필연이란 손상된 질서를 회복하기 위한 우주의 움직임이다. 이는 얄궂게도 인간이 바라는 방식으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무대(이태섭 무대디자인)는 이러한 내용을 상징적으로 담고 있다. 깊숙한 안쪽부터 중앙까지 내려오는 계단은 시간의 유유한 흐름을 담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콩크리트와 철제의 재질과 미니멀한 디자인은 황량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는 "덴마크는 감옥이야!"라는 햄릿의 대사처럼 인간이 벗어날 수 없는 초월적 질서를 떠올리게 한다. 극의 끝 무렵에는 가장 안쪽에 서 있는 기둥이 기울어진다. 시대의 관절이 맞춰진 것, 혹은 부패한 구시대가 무너진 것을 의미하는 듯….

이번 공연은 장례식과 선왕의 유령이 나타나는 장면을 속도감 있게 동시 진행하고, 관객들이 공감할 수 있도록 대사를 구어체로 다듬는 등 새로움을 느끼게 했다. 그러면서 '햄릿'이 지닌 깊이 있는 테마들은 충실히 살렸다. 연극의 사회적 의미, 죽음과 관련한 존재론적 고뇌, 호레이쇼(김영민)를 통해 전해지는 역사의 중요성 등. 원작의 깊이와 동시대성을 함께 살렸다는 점에서, 그리고 관록 있는 배우들의 절제된 연기를 보여줬다는 점에서 관극의 재미를 새롭게 알려준 '햄릿'이었다.

/현수정 공연평론가·중앙대 연극학과 겸임교수(lizhyun74@gmail.com)

현수정 공연평론가
전혜원 기자

ⓒ 아시아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제보 후원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