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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20세기 우주 탐사에 비견되는 고대 이집트 국가의 “뉴딜” 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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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5. 04. 06. 17:43

외계인에 들려주는 지구인의 세계사 <34회>
송재윤
송재윤 (맥마스터 대학 역사학과 교수)
외계인 미도가 물었다.

"지구인들은 진정 왜 고대부터 피와 땀과 혼을 바쳐서 그토록 거대한 기념비적 구조물을 만들어야만 했을까요? 고대 이집트인들은 피라미드를 만들어서 대체 무엇을 얻을 수 있었을까요?"

바로 이 질문에 대해 40여 년 고대 이집트 유적을 발굴해 온 미국의 고고학자 마크 레너(Mark Lehner, 1950~ )는 "피라미드가 이집트를 만들었다!"고 단언한다. 피라미드를 만든 주체는 고대 이집트인들이지만, 피라미드를 제작한 덕분에 고대 이집트 문명이 완성될 수 있었다는 얘기이다.

실제로 피라미드와 같은 거대한 구조물을 건설하기 위해선 수만 명 인력의 조직적 동원, 각 분야 전문가의 발탁·지원, 효율적인 징세와 합리적 재정 운영이 필수적이며, 기술력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강렬한 도전 의지와 탐구 정신이 요구된다. 완벽한 피라미드의 이상을 현실에서 물질적으로 구현함으로써 고대 이집트인들은 문명의 새로운 단계로 도약할 수 있었다. 바로 그 점에서 고대 이집트의 피라미드 제작은 20세기 우주 탐사에 비견되는 중대한 사건이었다.
기자 대피라미
기자 대피라미드. 출처 Mark Lerner, The Red Sea Scrolls.
◇ 피라미드는 문명사의 연속성을 증명

5000여 년 전 이집트에 나일강 유역 남북을 아우르는 통일 정부가 들어선 후로 최고 권력을 장악한 파라오들은 피라미드를 짓기 시작했다. 철골 콘크리트가 개발되기 이전 높은 건물을 세우기 위해선 오를수록 면적을 좁힐 수밖에 없었다. 메소포타미아, 인도, 아메리카에 세워진 고층 건물 역시 피라미드형이었다.


3왕조의 파라오 조세르(Djoser, 재위 기원전 2668~2649)가 제작한 피라미드는 6층의 계단식이었다. 4왕조 스네프루(Sneferu, 재위 기원전 2613~2589)의 피라미드는 중간부터 경사면이 가팔라지는 굴절형이었다. 계단식에서 굴절형으로 나아간 피라미드는 급기야 표면의 경사면이 매끄럽게 덮인 완벽한 오면체의 피라미드로 발전했다.

스네프루의 뒤를 이은 쿠푸(Khufu, 재위 기원전 2589~2566)가 제작했다는 바로 그 유명한 기자(Giza)의 대피라미드가 대표적 실례다. 규모, 정밀성, 완성도, 내구력 등 모든 면에서 기자의 대피라미드는 지구인의 전체 문명사에서 최고의 걸작품으로 손꼽힌다. 고대 그리스의 헤로도토스부터 21세기 걸출한 문화예술인까지 줄기차게 피라미드를 칭송해 왔다. 실제로 반만년의 세월을 견뎌낸 피라미드는 인류 문명의 연속성을 알려주는 생생한 증거다. 대체 청동기 시대 고대 이집트인들은 어떻게 그토록 정교하고 장엄한 거석 구조물을 세울 수 있었을까? 과연 어떻게 모랫더미 사막의 기반암 위에 완벽하게 아름다운 오면체를 구현할 수 있었을까?
와디 엘-자르프에서 발견된 4600년 전의 파피루스 문서
인류사 최초의 항구로 추정되는 와디 엘-자르프에서 발견된 4600년 전의 파피루스 문서. 같은 책.
◇ 피라미드를 만든 고대 국가의 비밀


이러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피라미드가 통일 국가 성립 이후 정부가 주도해서 만든 고대 이집트의 공적 구조물이라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된다. 피라미드는 한 고독한 예술가 개인의 창작물이 아니라 당시 고대 이집트 사람들의 피와 땀과 얼이 스며든 집체적 조형물이다. 기자 대피라미드 완성 당시 이집트의 인구는 대략 110만여 명쯤이었다고 추정된다. 2023년 기준 이집트 인구가 1억1450만명을 돌파한 점을 보면 실로 100분의 1밖에 지나지 않았다. 오늘날 기준에서 보면, 고대 이집트는 그저 작은 대도시 정도에 불과했다. 고작 110여만명의 인구를 무슨 수단으로 어찌 부렸기에 반만년의 세월 동안 존속하는 거대한 피라미드를 완성할 수 있었을까?

피라미드를 건축할 수 있었던 고대 이집트 국가는 과연 어떻게 그토록 강력한 행정력을 발휘할 수 있었을까? 역사적 수수께끼다.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의 이집트학자 베리 켐프(Barry J. Kemp, 1940-2024)는 피라미드 제작이 가능했던 이유를 '부양자 국가(the provider state)'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부양자 국가란 효율적 징세로 충분한 재정을 확보한 중앙 정부가 대규모 국책사업을 발주하여 대규모 고용을 창출하는 정치 체제를 가리킨다. 켐프에 따르면, 피라미드 건축은 백성의 고혈을 짜는 강제 노역이나 착취적 과정이 아니라 오히려 일자리를 줘서 먹고살 수 있게 하는 적극적 민생 구제책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해마다 나일강이 범람하는 6월 중순부터 10월 중순까지는 많은 농민이 농사를 지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사람들에게 피라미드의 건설은 이집트 통일 왕조의 위대하고도 신성한 상징물을 지으면서 동시에 빵과 맥주를 벌 수 있는 보람찬 노동의 기회였다는 주장이다.

◇ 경복궁 중건과 뉴딜 정책 사이

흥선대원군은 1865~1868년 3년에 걸쳐서 임진왜란 때 불에 타서 300년간 방치됐던 경복궁을 중건했다. 세도정치를 종식하고 왕실 권위를 높이려는 의도였지만, 경복궁 중건에 따른 왕실 재정의 악화는 오히려 조선왕조의 몰락을 앞당긴 사건이었다. 공사에 필요한 급전을 당기기 위해 대원군은 관직과 관품을 뿌리면서 원납전(願納錢)을 반강제로 징수했고, 당백전(當百錢)이라는 엉터리 화폐를 발행하여 경제질서를 무너뜨렸다. 경복궁 중건은 구한말 조선왕조의 빈약한 재정력, 주먹구구식 행정, 경제적 무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행정력과 경제력을 갖춘 정상 국가의 국책사업은 오히려 고용을 창출하고 소비를 진작하는 경제적 선순환을 도모한다. 대공황 이후 1933~1939년 미국의 루스벨트(Franklin D. Roosevelt, 1882-1945) 행정부가 추진했던 뉴딜(New Deal) 정책이 대표적이다. 연방정부가 적자 지출, 부자 증세로 재정 규모를 확장하고, 화폐 발행을 늘리고 이자율을 낮춰 통화량을 증대했다. 그렇게 확보된 대규모 재원을 댐, 교량, 도로, 공원 등 사회적 기본 시설과 학교, 병원, 공항 등 공공재를 확충하고 문화예술계를 지원하는 등 정부 주도의 적극적 경제 성장을 주도했다. 일단 돈을 빌려서 망가진 경제를 되살리고, 경제가 성장하면 세금을 거둬서 정부 빚을 되갚는 적극 재정의 방법이었다.

기자의 대피라미드 역시 정부 주도로 건설된 고대 이집트 국가의 기념비적 구조물이다. 고대 이집트인들이 피라미드를 제작하기 위해선 전 지역의 인재를 발탁하고 전 영토의 재원을 동원해야만 했다. 과연 피라미드 건축은 경복궁 중건의 실패와 뉴딜 정책의 성공 중 어디에 더 가까울까? 쉽게 말해, 피라미드 제작이 고대 이집트 국가를 재정 파탄, 사회 불안, 민심 이반, 정치 위기를 초래했을까? 아니면, 오히려 국가적 권위를 높이고, 고용을 창출함으로써 민생을 이롭게 하고, 나아가 정치적 안정과 사회적 통합에 기여했을까?

기자에서 120㎞ 떨어진 홍해변의 와디 엘-자르프(Wadi El-Jarf)에는 반만년 전 인공적으로 건설된 인류사 최초의 항구가 있었다. 그 항구에서 배를 띄운 이집트인들은 홍해를 거슬러 이집트 동쪽의 시나이(Sinai)반도로 가서 다량의 동(銅)을 캐서 실어 왔다. 배를 만든 목재는 동지중해를 바라보는 레반트(Levant) 지역에서 벌목한 침엽수였다. 그 배들을 안전하게 숨겨 두기 위해 고대 이집트인들이 항구 주변에 직사각형의 기다란 바위굴을 뚫었다. 그 인공의 창고 속에서 고고학자들은 다량의 파피루스 문서를 발견했다. 1,000개 이상의 파편으로 조각나 있는 대략 30여 장의 두루마리 문서들(scrolls)에는 반만년 전 기자 피라미드를 제작할 당시의 상황이 잘 드러나 있다. 레너는 바로 그 파편적인 문서 조각들을 분석하여 자신 있게 단언한다. "피라미드가 이집트를 만들었다!"

송재윤 (맥마스터 대학 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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