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은 연봉에 국내 재취업 어려워
中, 최고 대우 보장해 인력 유혹
국정원 "인력 탈취 수법 다양"
정부 대책 마련에도 실효성 떨어져
전문가 "인력 머물 수 있게 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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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이차전지 기업 B사는 기술 탈취를 위한 거점 마련을 목표로 지난 2020년 경기 성남 판교에 지사를 설립했다. 이들은 국내에서 열린 업계 행사 등에서 핵심기술 인력들에게 접근해 기존 연봉 최소 2배 인상과 각종 보너스, 국내 근무 보장 등을 제시하며 회유했다. 이 같은 방식은 국가정보원(국정원)에 의해 적발됐다.
국가핵심기술을 가진 인력의 해외 유출이 계속되고 있다. 특히 수십년 동안 관련 산업에 종사하며 쌓아온 경험과 기술, 이른바 '국부(國富)'가 경쟁국인 중국으로 손쉽게 넘어가고 있다. 최근 더욱 치밀해진 수법이 국정원에 포착되는 등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퇴직 후 국내 재취업 불가…갈 곳 잃은 핵심기술 인력들
아시아투데이는 반도체 기업들의 '지속가능경영(ESG) 보고서'를 통해 핵심기술 기업들의 5년(2020~2024년)치 인력 유출을 심층 분석했다. 그 결과 기업들 모두 40~50대 중견급 기술 인력이 꾸준히 이탈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우리나라 대표 기업으로 꼽히는 삼성전자는 매년 3000명 수준의 40대 이상 R&D 인력이 회사를 떠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삼성전자 전체 임직원 중 '40대 이상' 비율과 '연구개발(R&D) 인력' 비중, '퇴직률'을 종합한 수치다. 정확한 규모는 공개되지 않았다.
또 다른 대기업 SK하이닉스의 경우 매년 50세 이상 직원 70여 명이 '비자발적 이직'으로 회사를 나갔다. 비자발적 이직이란 사실상 정년퇴직을 의미한다. SK하이닉스 전체 직원의 약 22%가 R&D 인력이라는 점을 적용하면 50대 이상 R&D 인력은 해마다 17~20명 정도가 정년퇴직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스스로 떠난 이들까지 포함하면 30여 명 규모다.
두 기업의 규모와 퇴직률에는 차이가 있지만, 40~50대 이상 베테랑 기술자의 이탈이 매년 발생하고 있다는 점에서 '핵심기술 인력의 누수'라는 본질은 동일하다. 이들이 우리나라에서 새 직장을 구하기란 만만치 않다. 다수의 업계 관계자들에 따르면 국내 기업에서 30년 동안 근무한 정년 퇴직자들의 순수연봉은 1억 2000만원 이상이다. 업계 관계자는 "정년퇴직으로 직장을 나와도 5~10년은 더 일을 해야 하는데 연봉 수준을 맞춰줄 업체가 없다"며 "국내에서 일자리를 찾지 못하니 이들 대부분이 다른 쪽으로 눈을 돌린다"고 말했다.
◇핵심기술 인재 유혹하는 중국 '검은 손'
중국은 국내 퇴직자를 타깃으로 수년째 노골적인 관심을 드러내고 있다. 본지가 국정원으로부터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중국의 유인 수법은 점점 교묘해지고 있다. 기존에는 국내 경력이 있는 지원자를 채용하거나 퇴직자에 직접 입사를 제안하는 단순한 방식으로 접촉이 이뤄졌다. 새로운 수법의 대표적인 경우가 우방국 기업으로 위장하는 사례다. 중국 반도체 기업 A사는 경영난에 처한 미국 중소 반도체 기업 B를 인수하고 B사 명의로 한국지사를 설립했다. B사는 미국 반도체 기업임을 홍보해 국내 주요 기업 인력을 채용했고 기술을 이전했다. 이후 중국 본사로 기술을 빼내갔다.
퇴직 후 2~3년 동안 국내외 경쟁사 이직을 금지하는 경업 금지 조항을 피하기 위해 업종이 다른 제3의 업체를 이용하는 경우도 있다. 페이퍼 컴퍼니 형식의 컨설팅 기업에 임시로 취직시키거나 기존 업무와 전혀 다른 업종에 취업하도록 한 후 기술 유출을 시도하는 것이다.
민간 컨설팅 업체를 내세워 고액 연봉과 자녀 학비 지원 등이 명시된 포섭 메일을 보내는 '치밍(啓明· Qiming)' 수법, 세계적 기술을 보유한 기업을 통째로 사들이는 '타깃 기술 보유기업 인수' 수법 등도 새롭게 등장한 인력 탈취 방식에 해당한다. 국정원은 "중국 기업들이 채용과정의 외부 노출을 철저히 차단하거나 정상적 채용 활동으로 속이고 있기 때문에 범죄 정황을 포착하기 쉽지 않다"고 전했다.
◇국내 인력 유출 속 빠르게 성장하는 중국
중국은 최근 우리의 핵심 기술 분야, 특히 반도체 산업에서 글로벌 점유율을 빠르게 키웠다. 미국반도체산업협회(SIA)에 따르면, 중국 반도체의 글로벌 생산 점유율은 2020년 18%에서 2025년 24%로 증가했다. 한국은 18%를 유지하는 데 그쳤다. 국정원은 이 기간(2020~2024년) 반도체 등 국가산업기술의 해외 유출이 105건에 이른다고 밝혔다. 업계에선 중국 기업들이 고액 연봉으로 우리나라 인재를 빼내간 영향으로 분석하고 있다.
본지가 중국 현지 채용 사이트에 올라온 기업들의 채용 공고를 조사한 결과 DRAM, 고대역폭메모리(HBM) 등 개발 경력자를 찾는 공고가 다수 발견됐다. 이 기업들이 제시한 연봉은 3억원에 이른다. 우리나라 기업의 2.5배 이상이다. 반도체 분야 핵심 관계자는 "중국 성장에는 우리나라 인력 유출의 영향이 크다. 중국 정부가 많은 지원을 하다 보니 대우가 한국과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중국에 건너 간 개발자들은 얼마 못 가 '토사구팽' 당하기도 한다. 기술 전수가 끝나 더 이상 국내 인력이 필요 없어진 중국 기업이 개발자들을 내쫓는 것이다. 이 관계자는 "좋은 조건으로 인정 받고 중국에 건너가는 것 같아도 2~3년이면 기술 탈취가 끝나 중국 기업으로부터 버림 당하기 일쑤"라고 말했다.
그러나 인력 보호를 위한 정부 대책은 지지부진하다. 산업통상자원부는 3년마다 핵심기술 유출 방지를 위한 종합계획을 수립하고 있다. 하지만 인력 유출 대책은 '특허심사관 채용'이 유일하다. 매년 쏟아져 나오는 기술 인력들을 감안하면 특수직 채용은 연 60여 명 규모로 매우 부족한 상황이다. 중소벤처기업부가 2020년 국가핵심기술 인력을 고용한 중소기업에 6개월 치 급여 일부를 지원해 주는 사업을 추진했으나 이마저도 1년 만에 중단됐다. 지속적인 인건비를 감당하지 못한 중소기업들이 참여를 포기했기 때문이다.
이종환 상명대 시스템반도체공학과 교수는 "기업을 다니던 전문 인력들이 정년퇴직 등을 이유로 이직할 때 중국의 타깃이 된다. 기술적으로 인정이나 우대받기를 원하는 이들의 심리를 이용하는 것"이라며 "인력들이 국내 다양한 기업에서 본인의 실력을 발휘하며 머무를 수 있도록 정부와 기업의 예우와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