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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원재의 스포츠人] “축구계 건강하게 발전할 수 있는 행정 해보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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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원재 선임 기자

승인 : 2025. 02. 27. 09:04

정재권 한양대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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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대 정재권 감독./사진=전형찬 기자
아시아투데이 장원재 선임 기자 =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명선수는 올드팬의 가슴 속에 추억을 남긴다. 정재권(54) 한양대 감독도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1992년 8월 다이너스티컵 한일전 정재권의 논스톱 공중제비차기 발리킥 슛은 한국 축구가 만들어낸 가장 아름다운 골 중 하나다.

- 축구는 언제 시작했나.

"아버자 권유로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시작했다."

- 본인 의지가 아니었나.

"제가 어릴 때, 3학년 때까지는 시골에서 자랐다. 아버지가 사업하신다고 부산으로 이사했는데 제가 시골에서 살다보니 좀 말썽꾸리기였다. 막 뛰어다니는 거 좋아하고 서리도 좀 하고...이러다 보니까, 축구부에 들어가면 예절 교육도 받고 에너지가 좀 다듬어지지 않겠나 싶어서 아버지가 추천했다."

- 그 시골은 어디인가.

"경남 사천에 있는 곤양읍이다."

- 부산으로 이사한 후 처음부터 축구를 했나.

"아니다. 부인초등학교에서 육상부 활동을 좀 하다가 사하초등학교로 전학하면서 5학년 때부터 본격적으로 축구를 시작했다."

- 재밌었나.

"재미없었다. 다만, 그냥 공을 쫓아 뛰는 건 재미있었다. 말하자면 전술이나 작전 등 축구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다. 발만 빨라서 그냥 공을 쫓아서 뛰는 일엔 흥미를 느꼈다."

- 패스나 전술에 대해서는 언제 눈을 떴나.

"고등학교 때다. 공만 쫓아 뛰는 선수였는데, 동래중학교 때 선생님이 포지션을 이동시켜 주셨다."

- 이동 전 맡았던 포지션은 어디였나.

"제일 처음에는 스위퍼를 봤다. 제가 공을 찰 줄 모르니까, 뒤로 흘러나오는 볼을 무조건 밖으로 걷어냈다. 그것이 제 임무였다. 스피드가 있으니까 나름대로 역할은 했다."

- 중학교 때 이동한 포지션은.

"장평중학교 1학년 때 사이드백, 2학년 때는 윙포드, 3학년 때는 스트라이커로 보직을 바꿔주셨다. 다양한 포지션을 경험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경기 운영에 대해서 조금 눈을 떴다."

- 부산상고 졸업 무렵 전국 랭킹 최상위권에 들어서 한양대로 갔다.

"그 랭킹은 당시 언론에서 붙여준 거다. 축구는 각 선수들 포지션도 다르고 순위를 매기기가 어렵다. 그래도 영남 지역에서는 '스피드 경쟁력이 뛰어난 선수'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 한양대 89학번이다. 동료는 누가 있었나.

"풍생고등학교 출신의 황중철이 동기 중 에이스였다. 여섯 게임 연속 득점하고 우승까지 시킨 독특한 선수였다. 청소년 대표팀 주전 센터포워드였다. 그리고 고인이 되었지만, 경신고 나온 김승환 골키퍼도 입학 동기다."

- 4년 후 정재권 때문에 한국 프로축구 드래프트 제도가 바뀐다.

"제 케이스 이전에 조짐이 있었다. 홍명보 선배는 드래프트 거부하고 상무에 입대했고, 황선홍 선배도 독일 아마추어팀으로 갔다. 제 경우는 디테일에서 차이가 있다."

- 뭔가.

"두 분은 아예 드래프트를 거부했고, 저는 완산 푸마 지명을 받았지만 입단 거부를 한 거다."

- 그래서 당시 실업축구 중소기업은행에 입단했다.

"기업은행에서 1년 있으면서 문제를 제기했다. 드래프트 다시 넣는 조건을 달았다. 당시 윗선에서 제 지명 케이스에 확실히 문제가 있다고 인정하고, 제 말을 잘 받아주셨다. 제도를 바꿨다."

- 완산 푸마에서 1차로 지명했다.

"1993년 드래프트다. 그런데 당시 완산 푸마는 정식 창단 절차를 마치지 못한 상태였다. 1993년 시즌엔 결국 참가하지 못했고, 1994년 시즌에 전북 버팔로로 리그에 참여했다."

-완산 푸마는 1992년 2월 창단승인이 일단 보류되었다가 그해 7월 최종 승인을 받았다. 당시의 우여곡절은 언젠가 제가 특집 기사로 쓰려고 한다. 완산 푸마엔 처음부터 입단 생각이 없었나.

"그건 아니다. 돌아가신 배기면 감독님이 초대 감독으로 가시면 제가 따라가려고 했다. 그런데 5월에 제가 바르셀로나 올림픽 평가전 하러 외국 나가 있을 때 돌아가셨다. 꼭 입단해야 하는 동력이 사라진 거다."

- 선수로서는 상당히 평가가 좋았다.

"일본 히로시마 산프레체에서도 제안이 왔지만, 여러 가지 개인적인 상황 때문에 갈 수 없었다. 드래프트 거부로 소속팀이 없었지만, 대표팀 경기엔 출전해야 하니 한동안 축구 협회 소속으로 지내다 중소기업은행에 입단했다."

- '축구협회 소속'은 선수 자격은 있는데 팀이 없는 경우에 취하는 방식이다. 1970년대 후반 '차범근 선수'도 잠깐 축구협회 소속으로 있었던 사례가 있다.

"맞다. 3개월 정도 축구협회 소속으로 지내다 3월에 중소기업은행에 입단해서 1년 동안 열심히 운동했다."

- 1994년 대우 로얄즈에 입단했다.

"한국 프로축구사상 최초의 억대 계약금을 받았다. 1억 6,500만 원이다. 최초의 억대 연봉자가 나온 건 이듬해인 1995년이다. 포항의 홍명보 선배가 1억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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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대우 로얄즈의 정재권./ 사진제공=정재권
- 대우 시절은 어떻게 기억하나.

"대우 로얄즈는 제 로망이었다. 어릴 때 제가 축구를 하면서 유일하게 입단을 꿈꿔왔던 구단이었다. 부산이 연고지였고, 대우 경기를 보면서 축구에 대한 눈을 떴다. 어린 시절부터 꿈에 그리 구단에 드디어 입단했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 대우 축구단은 스쿼드가 어마어마했다.

"김풍주, 박창선, 조광래, 정용환, 변병주, 이태호, 이춘석, 유태목, 강신우 등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일류 선수들이 많았다. 베스트 11명 중 8명이 현역 국가대표, 3명이 전 국가대표였으니까 뭐 말할 게 없었다."

- 본인도 올림픽 본선에서 골을 넣는 등 태극 마크를 여러 번 달았다.

"운이 좋았다. 올림픽 가서도 본선 모로코와의 경기 때 골을 넣었다. 바로 그 골 때문에 또 김호 감독님이 대표팀에 발탁해 주셔서 대학생으로 유일하게 다이너스티컵에 출전할 수 있었다. 그 대회에서 또 두 게임 연속 골도 넣고, 그런 기회를 받았던 것 자체가 저에겐 굉장히 큰 행운이었다."

- 다이너스티컵 중국 전, 일본 전에서 연속 득점했다. 한일전 정재권의 발리킥골은 지금도 올드팬의 기억에 생생하다. 공이 날아올 때 발리킥으로 바로 차겠다고 생각했나.

"연습 때 그런 부분들은 항상 인지하고 있었다. 그때 마침 타이밍이 좋았다. 볼도 제가 즐겨 연습한 높이로 왔다. 논스톱으로 슛하는 순간 제대로 맞았다는 감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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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다이너스티컵 득점 후 환호하는 정재권./ 사진제공=정재권
- 누가 올려준 크로스였나.

"김정혁 선배님이 올리고 고정운 선배님의 백헤딩한 것으로 기억한다."

- 허리보다 조금 낮은 높이의 공을 정재권은 바이시클킥 비슷한 발리킥, 정확하게는 하프 발리로 때렸는데 기가 막히게 골문 구석을 갈랐다.

" 이길 줄 알았는데 승부차기까지 가서 결국 졌다. 저는 승부차기는 못찼다. 쥐가 와서 교체돼 나왔다."

- 1992년 다이너스티컵은 대표팀 세대교체의 실험장이기도 했다.

"맞다. 그 대회를 통해서 대표팀 세대교체가 이뤄졌다."

- 월드컵 본선에서는 못 뛰었다. 안타까움이나 회한은 없나.

"있다. 아쉬움이 많다. 근데 열심히 했기에 후회는 없다. 제 마지막 월드컵 출전 기회가 94년 월드컵이었다. 그런데 93년 8월 아르헨티나 벨레스팀과 평가전에서 오른쪽 발목이 부러졌다. 94년 2월엔 마산 동계훈련 중 새끼발가락이 부러지면서 대표팀을 나왔다. 정말 자신도 있었고 열정도 있었지만 부상이라는 변수는 제가 어떻게 컨트롤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

- 좌절감이 심했나.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때도 소집일 닷새 전 부상으로 낙마했다. 한동안 좀 힘들었지만, 주변 분들이 많이 도와주셔서 이겨낼 수 있었다."

- 1994년 월드컵에 출전했다면 서정원, 정재권 두 명의 스프린터가 엄청난 속도로 상대를 흔들었을 듯 하다.

"주변에서 그런 기대를 많이 했었다. 저희도 농담 삼아 선배들과 이야기도 많이 했다. 실현 되었더라면, 또 다른 볼거리를 제공하지 않았겠나 생각한다."

- 스피드는 타고나는 건가.

"저는 그렇게 생각한다. 후천적으로는 그런 반응이나 속도감을 가질 수 없다고 본다. 다만 후천적인 노력을 꾸준하게 해야 체력이나 근력이 올라간다. 그래야 타고난 장점을 더 오래 유지할 수 있고 조금 더 개선할 수 있다."

- 1998년 포르투갈 1부리그 비토리아FC에 갔다. 첫 경기에 골을 넣었다.

"개인적으로는 뛸 준비를 아직 못한 상태였다. 저를 뽑아준 감독님이 데리러 왔고, 바로 출전시켜서 첫 골까지 득점하는 행운이 따랐다. 그 경기를 통해서 벤피카라든지 명문 팀과 경기할 때도 제가 선발 멤버로 들어갈 수 있었다."

- 그때 임대로 간 거였나.

"선임대 후 완전 이적 조건으로 갔다."

- 그런데 왜 연장 계약을 안 했나.

"에피소드가 좀 있다. 저하고 같이 갔던 에이전트가 치질에 걸렸다. 그래서 한국으로 급히 귀국해서 연락이 끊어졌다. 당시만 해도, 휴대전화가 거의 없던 시절이다. 포루투갈에서는 연장 계약하자며 오퍼를 했다. 제가 경기하는 걸 보고 마음에 든 거다. 그런데 에이전트와는 연결이 안 되고, 한국은 월급이지만 유럽은 주급인데 주급이 1~2주 밀리니까 그것이 또 묘한 스트레스였다."

- 그래서 구단에 연락했나.

"생활환경도 그렇고, 훈련 등 제가 처음 경험해 보는 상황이 이어졌다. 한국 구단에 전화하니까 그렇게 스트레스 받을 거면 돌아오라고 하더라."

- 그 말이 다였나.

"'당연히 아니다. 저한테 굉장히 달콤한 말이 들려오더라. 최고 대우해줄 테니까 일단 들어오라고, 들어왔다가 다시 나가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그렇게 해서 귀국했다."

- 후회하나.

"후회한다. 축구 선수의 로망인 유럽까지 가서 그 위치까지 갔는데 돌아온 거니까. 어찌 보면, 그때는 멘토가 없었고 제가 좀 철이 없기도 했다."

- 지금처럼 이적 시장이 세계화되었거나 에이전트들이 보다 더 정교하게 움직였다면 계속 유럽에서 활동했을까.

"물론이다. 무조건이다. 유럽에서 선수 생활 하는 것이 평생의 꿈이었기 때문이다. 일단 귀국했다가 언제든 다시 가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만사가 뜻대로 풀리는 건 아니지 않나. 어찌 보면 그때가 제 축구 인생에서 가장 아쉬운 순간이다."

- 2014년부터 모교에서 지휘봉을 잡고 있다. 한양대 감독으로서 제일 하고 싶은 일은.

"일반적으로는 우승을 말하겠지만, 저는 우승보다는 아이들한테 항상 이야기하는 것이 있다. 한양대 축구팀을 통해 성장하고 발전하는 선수가 되자고 한다. 제가 도와주고 만들어줄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그걸 통해서 한번 도전해 보자고 이야기 많이 한다. 앞으로도 좋은 선수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 제자 중에 가장 기억 남는 선수는.

"원두재 선수다. 충북 운호고등학교 시절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무명 선수였다. 제가 상대 게임을 보러 갔다가 우연히 발견하고 스카우트했다. 보자마자 플레이 스타일이 딱 마음에 들었다. 서로 좋아서 만났고, 제자와 제가 동반 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 구체적으로 어떤 점이 그런가.

"입학 후 1년 6개월 만에 태극마크를 달았다. 신장은 참 좋았는데 신입생 시절엔 몸무게가 70kg밖에 안 나갔다. 근육량을 늘려서 1년 만에 80kg로 만들었다. 엄청나게 노력하더라. 그걸 보면서, '아, 선수가 기본적인 재능이 있으면 노력해서 이 정도까지 발전할 수 있구나'라는 걸 제가 배우고 또 경험했다."

- 원두재 선수 보러 UAE도 간 적 있나.

"아직은 없다. 원두재 선수가 초청했는데, 스케쥴 맞춰서 한번 가보려고 한다."

- 2024년 9월엔 라오스 U-19 임시감독으로 선임되었다.

"그쪽에서 관심이 있어서 서로 좀 이야기가 있었다. 라오스가 동남아에서는 축구가 비교적 약한 나라이고 시스템이 아무것도 갖춰지지 않았다. 그래도 의무감과 책임감에 제안을 수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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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9월, 정재권 감독은 라오스 U-20 대표팀 임시 감독으로 부임했다./ 사진제공=라오스 축구협회
- 어떤 점인가.

"한국 지도자들이 동남아에서 많은 관심을 받는 시기였다. 성과도 냈다. 또 라오스 대표팀 감독으로 하혁준 감독이 부임 예정이어서, 20세 이하 팀도 한국 감독이 이끌어줄 수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 한양대학교와는 교통정리를 어떻게 했나.

"라오스 축구협회가 학교에다 정식 공문을 보냈다. 총장님이 흔쾌히 한 달 파견을 허락하셔서 라오스로 갔다."

- 라오스에서 가장 보람 있었던 일은.

"아이들의 배우고 싶은 의욕과 의지는 상당한데, 체계적인 시스템을 만들었더니 제가 어떤 교육을 하거나 행동하는 것에 대해서 모든 선수가 정말 진지하게 따라주더라. 그 결과, 국제대회에서 2년 만에 첫 승이라는 결과를 얻었고, 청소년 팀에서 성장해서 제가 가르친 선수 중 5명이나 대표팀에 뽑혀갔다. 그것이 저한테 굉장히 큰 의미가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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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스에선 선수들과 의미있는 시간을 많이 보냈다./ 사진제공=정재권
- 2년 만의 국제대회 첫 승 상대는 어디였나.

"몽골이다. 홈에서 6-0으로 이겼는데, 라오스 축구 역사에서 6-0 승리는 아무도 상상 못했던 스코어라고 했다."

- 라오스 축구 역사상 최대 골차 승리였나.

"그래서 그 경기 이후 총리도 그다음 게임에 나오셨다. 라오스 정치권이 축구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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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U-20 아시안컵 인디아 대 라오스 전 공식 포스터./ 사진제공=라오스 축구협회
- 축구인 정재권에게 앞으로의 꿈이 있다면.

"지도자나 선수나 구단이 건강하게 발전할 수 있는 행정을 좀 해보고 싶다는 꿈이 있다. 기회가 생긴다면, 협회나 연맹에서 한번 일해보고 싶다."

▲ 정재권(54)은 사천 출생으로, 부산 사하초, 장평중, 부산상고, 한양대를 졸업했다. 실업팀 중소기업은행(1993)을 거쳐 부산 대우 로얄즈(1994~1999), 포항 스틸러스(2000~2001)에서 선수로 활약했다. 대우 시절 기록은 99경기 출전 20득점, 포항 시절은 17경기 출전에 1득점이다. 1997년 대우의 우승에 크게 기여한 뒤 1998년엔 포루투갈 1부리그 비토리아FC에 임대 선수 신분으로 5경기 출전, 1득점을 기록했으나 행정적인 문제로 3개월 만에 부산으로 복귀했다. 2008년 아마추어 서울유나이티드가 그의 마지막 현역 팀이다. 대표팀으로는 1992~1997년 15경기 3골을 득점했고,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 출전했다. 지도자로는 동의대 코치(2002), 동래중 감독(2003~2007), 한양대 코치(2008~2013)를 거쳐 2014년부터 모교 한양대 감독으로 재직하고 있다. 2024년엔 라오스 U-19 대표팀의 임시 감독으로 봉사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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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치앙마이 전지훈련장에서 만나 정재권 한양대 감독(왼쪽)과 장원재 선임기자.사진=전형찬 기자
장원재 선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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